[이응준의 시선] 선량한 역사가 있다는 착각

입력 2023-09-07 17:44   수정 2023-09-13 10:11

‘순진’하다는 건 남도 나 같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순수’하다는 건 남도 나 같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최근 ‘홍범도 파동’을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아픈 진실’을 견딜 수 있을 때 개인이든 국가든 강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팩트가 엄연한데 논란이 분분하니, 대중화되지 못한 진실은 정치적 진실이 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편안한 거짓’들은 하나둘씩 균열이 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는 ‘복잡한 일부분’에 집중하다가 ‘간명한 전체’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917년 11월 로마노프 왕조를 전복한 볼셰비키는 적백내전(赤白內戰)에 빠져들었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열강들이 백군을 지원하려 파병했다. 미군 9000명, 영국군 7000명, 중국군 2000명, 이탈리아군 1400명, 프랑스군 1300명, 캐나다군은 소수였고, 7만2000명의 대군을 동원한 게 일제(日帝)였다. 연합군은 총지휘권을 일본군 사령관 오타니 기쿠조에게 위임하기까지 했다. 볼셰비키가 ‘극동공화국’이라는 중립적 색채로 위장한 괴뢰국을 세운 까닭에는 일본과의 대결을 완충하려던 게 크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4년여 주둔하며 병력 연 10만 명, 군비 9억엔을 소진했다. 러시아 적백내전에서는 적군 120만 명, 백군 150만 명이 사망했다. 조선인, 일본인, 러시아인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은 어느 군대, 어느 빨치산이랄 것도 없이 서로서로 마구 저질렀다. 볼셰비키와 일본은 피차 타협이 절실했고,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물러나 러시아로 치고 들어가지 않는 대신 볼셰비키가 조선인 항일무장세력들을 처리해준다는 밀약(密約) 상태가 성립된다.

1921년 초부터 극동공화국 내에 있는 ‘자유시(Svobodny)’로 조선인 항일무장단체들이 거의 다 모여든다.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무기 제공을 비롯한 지원들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적군(赤軍)과 연합해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포함한 나머지 조선인 항일무장단체들을 학살한다. 이게 ‘자유시참변’의 골자다. 조선인 항일무장단체들끼리의 분열, 반목의 원인과 그 상황 설명에는 도표가 서너 장으로도 부족하다.

홍범도가 어쩌고를 떠나서, 나는 왜 한국인들이 이토 히로부미는 미워하면서 저런 레닌에게는 원한을 안 가지는지 이해가 안 간다. 레닌이 조선인의 독립을 원했다는 것은 헛소리다. 레닌은 상해임정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200만 루블어치 금화를 줬을 때부터 일관되게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의 볼셰비키화와 조선인 항일무장단체들의 적군 편입을 추진했다. 자유시참변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무장독립군들마저도 소비에트에 의해 사형당하고, 포로가 되고, 벌목죄수가 되고, 적군에 강제 편입됐다가 용도폐기됐다.

레닌의 소련군 대위 홍범도는 ‘복잡한 일부분’이고, 일본과 야합한 레닌은 ‘간명한 전체’다. 레닌이 스탈린보다 덜 악해 보이는 것은, 스탈린이 레닌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일 뿐이다. 레닌의 소련은 스탈린의 소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1936년 스페인내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 예술가 들이 프랑코 쿠데타 정권과 싸우기 위해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그중에는 소설가 조지 오웰도 있었다. 초반에 그는 의용군이 멋진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환상에 젖었다. 하지만 미친 살육은 프랑코 쪽이나 공화파 쪽이나 마찬가지였고, 의용군 내부에서 소련의 지령을 받은 스탈린주의자들이 다른 좌파들을 고문, 살해, 숙청하는 것에 질려버리게 된다. 딱 공포소설 플롯이다. 목에 총상까지 입고 탈출한 조지 오웰은 스탈린이 히틀러, 무솔리니와 똑같은 파시스트이며 공산주의는 최악의 전체주의임을 깨닫는다. 그는 선량한 역사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은 악에게 이용당하는 낭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아픈 진실’을 직시했다. 20세기에만도 약 3억 명 이상이 정치적으로 희생됐다.

조지 오웰은 “지식인이 말장난을 못 하게 되는 건 전쟁이 터졌을 때”라고 했다. 자유시참변은 국제정치의 기본 모델이다. 내가 시진핑이라면 대만보다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 더 크고 다양한 이득들을 취할 것이다. 압도적 군사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지정학적으로 최악인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은 순진한데 순수하기까지 하다. 비참한 불행은 ‘편안한 거짓’ 속에 울긋불긋한 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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